알카드 : 어머니!!

리자 : 이 목소리는 알카드, 거기 있는 것이냐.

알카드 : 어머니 지금 구하려 갈께요.

리자 : 안돼!! 알카드 오면 안돼.

알카드 : 그래도 어머니.

리자 : 괜찮아 내 목숨에 모든 사람이 행복을 맞이한다면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

알카드 : 안돼요 그런 건.

리자 : 미안하다 알카드. 너만은 행복하기를, 그래도 나의 최후의 말을 가슴에 세기며 살기를.

알카드 : 어머니.

리자 : 사람을 증오하기를, 사람을 죽이기를.

알카드 : !!

리자 : 살면서 죄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인간에게 더 좋은 것, 자 이 사람들부터 죽여라.

알카드 : 아니야.

리자 : 뭐하는거야 알카드

알카드 : 그런걸 말할 리 없어.

리자 : 뭐라고 말하는 거냐. 죽여서 모두를 행복하게 해라.

알카드 : 확실히 어머니가 아냐, 이 자식 누구냐.

서큐바스 : 내 주술을 깨다니 맘에 드는군.

알카드 : 용서하지 않겠다. 네 녀석은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마.

서큐바스 : 천천히 묶어주시죠, 아기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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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바스 : 이 피의 냄세. 왜 어둠의 피 냄새가. 아 설마. 이 강함. 아름다움, 당신은 백작의...

알카드 : 꿈의 세계에서 죽음은 정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아.



알카드 사마가 역시 짱임. ㅇ_ㅇ

추정연령 400살이고(월하의 야상곡 당시) 이름을 영어로 쓰면 alucard, 뒤집어 쓰면 dracula.

본명은 아드리안 파렌하이츠 쩨페슈 로써 드라큘라 백작의 아들이지만,

인간이었던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서 처형당하고, 그것을 방관한 아버지와 결별 후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아버지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드라큘라 백작을 때려잡게 됨.



알카드 : 아버지.

드라큘라 : 오! 누군가 했더니 오랜만이구나 나의 아들이여.

알카드 : 가능하다면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허나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돼요.

드라큘라 : 변함없이 인간의 편을 드는 군. 허나 녀석들이 네 엄마에게 한 짓은 잊지 않았겠지.

알카드 : 잊을 리 있겠어요, 허나 어머니는 인간에게 보복을 바라지 않았어요.

드라큘라 : 아직 이런 세상에 미련이 있다고 하는 건가, 뭐 됐어, 이번에야말로 그 미천한 피를 없애 내 수하에 참가시키도록 하지.

알카드 :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드라큘라. 다시 너를 쓰러트리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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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드 :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요!, 더 이상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요.

드라큘라 : 왜, 왜인가, 왜 내가 이렇게 진 것이지.

알카드 : 힘이란 것은 지킬 것이 있을 때 한계를 넘는 게 가능해요, 사랑하는 자를 잃을 때, 사랑하는 것을 막을 때, 당신은 지게 돼 있어요.

드라큘라 : 그런가, 책망인가, 힘을 추구한 탓에 잃어버린 것을... 나의 패인인 것인가.

알카드 : .....

드라큘라 : 알카드여, 가르쳐다오, 리사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는가를.

알카드 : 인간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인간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면 자기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다. 이 세상을 지배할 자는 절대로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드라큘라 : 리사, 내가 틀린 것 같군.



97년에 나온 게임인데 악마성 시리즈의 최고의 걸작이자 지금까지도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있음.

특히 음악 최고!!

참고로 본인은 이 게임의 거의 최초의 고전 패키지를 정품 소장중. (1986년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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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상으로 프리덤이 우위인데 깨지다니... -_-;;
그래도 멋지긴 함.
뭐, 나중에 ZZ건담 보니까 20여년 전의 전투 장면을 재탕해먹은 부분도 보이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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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모로 정권을 쥐고, 황제자리에 앉다. (655 ~ 690)

 무후는 황후 자리를 탈취하면서 자기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막강한 정적들을 보았다.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자신의 자리가 오래 갈 수 없음은 물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후가 된 그날부터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고삐를 바짝 죄였다.

그녀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 고종의 외삼촌이자 관롱 집단의 우두머리인 장손무기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조정의 대신 장손무기는 북주 이래의 명족이며, 국가의 주춧돌로서 30년이나 대신으로 일한 원로였다.

그러나 그와의 승부에서 패배하면 황후의 지위는 물론 일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휘하의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는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한번 권력투쟁을 하여 승리할 때마다 그만큼의 자기의 권좌가 강화되어 갔다.

 

 이 무렵 무후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현경 5년인 660년, 고종은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다 두 눈의 시력을 거의 다 잃었다.

그러다보니 국사 전반을 기지 넘치고 영리한 무후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무후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징조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여자가 전면에 나서서 정치를 한 일이 없었기에 무후는 자신의 심복이자 조정의 보수파 중신들에 의해 승진이 막혔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두 사람과 국무를 처리했다.

또한 진사과 출신의 과거 합격자들을 요직에 등용시켜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기존의 공신집단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조치는 무후 개인에게 많은 이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상에 있어서 활발한 개혁의 작용을 하여 각 방면에서 많은 치적을 쌓게 하였다.

 

 한편 무후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이름만의 황제인 고종은 그녀를 폐위하고 싶어 했다.

그때 한관 왕복승이 고종에게 달려와 무후가 도사와 함께 황상을 저주하는 굿을 벌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굿이라면 유별나게 꺼려했던 고종은 몹시 화가 나서 측근인 상관의(上官儀)를 궁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고, 이 과정에서 고종은 상관의로 하여금 무후를 내치는 조서를 받아쓰게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궁중에는 무후의 심복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폐위 조서가 작성되고 있다는 소식은 즉각 무후에게 전해졌다.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뽑힐 만한 다급한 소식을 들은 무후는 아름다운 눈썹이 곤두서고 노기로 새파래진 얼굴로 고종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려는 바르르 떨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종을 책망하면서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서가에 놓여진 칙서를 발견하곤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1)그리고 놀란 나머지 벌벌 떠는 고종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것이 고종으로서는 무후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었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은 나날이 무력해졌고, 무후의 세도는 갈수록 당당해져 황제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때 황태자는 유씨 소생의 이충(李忠)이었는데 무후는 이충을 폐하고 자신이 낳은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홍은 겨우 5세의 어린 나이었으나 성장함에 따라 어질고 효성스러웠다.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머니인 무후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직언하였기 때문에 무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상원 6년(674) 8월, 무후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제, 황후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 천후(天后)라 하였고, 이와 함께 12조항의 통치방침을 발표했다.

이것은 당나라에 대한 멸시일 뿐 아니라 남편 고종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으나, 이것으로 자기가 직접 집권하는 정권 수립에 한발 더 나아간 것이기도 했다.

 

 다음해에 황태자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이미 30세를 넘었으니 빨리 결혼시켜 야 한다고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그런데 이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된 소숙비의 딸이었다.

고종은 기꺼이 황태자의 청원을 윤허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무후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음인지 황태자 이홍이 급사하는 변이 일어났다.

무후는 타고난 정치가였으므로 어머니이기 이전에 정치가였다.

2)무후가 황태자 이홍을 독살했을 가능성은 극히 농후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홍이 죽음으로써 옹왕(雍王) 이현(李賢)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고종의 여섯째아들로 무후가 이홍 다음에 낳은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현은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韓國夫人)이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한국부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었는데 궁중에 출입하다가 고종과 관계되어 이현을 낳았으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부인은 동생 무후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전해지고 있었다.

이현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로 그 주변에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들 학자들과 공동으로 남조 송대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은 3)『후한서(後漢書)』에 주석을 가하여 후세 연구가들에게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출생에 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후부터는 눈에 띌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여 점점 평판이 나빠져 갔다.

이런 가운데 무후로부터 황태자 자리를 양위하라는 압력을 받지나 않을까 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모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황태자의 마구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이 발견된 것이 증거가 되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얼마 후 파주로 옮겨졌다가 그 곳에서 자결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현(李顯)이 황태자가 되었다.

홍도 원년(弘道元年, 683) 고종이 죽자 황태자 이현(李顯)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중종(中宗)이고 무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중종이 즉위함으로써 황후가 된 중종의 처 위씨(韋氏)는 황후에 오르기 전부터 멀리서 시어머니 무후를 바라보면서 황후의 자리가 그렇게도 권한이 대단한 자리인가 하고 늘 선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망하던 자리에 오른 지금에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위황후는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문하시중의 요직에 기용하여 하였다.

 

 이에 무후는 크게 노하였다. 이제 갓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친정의 영달을 생각하고 있는데 부아가 난 무후는 그러한 아내를 누르지 못한 황제 중종도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이현도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고종의 여덟 번째 아들 이단(李旦)이 예종(睿宗)으로서 즉위하였으나 그도 유폐 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을 뿐 정치에는 관여치 못하였다.

 

 이제 무후 자신이 황제가 되려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이는 반대파의 완강한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씨 종친과 그 후손들의 목숨을 건 저항은 불을 보듯 뻔했다.

광택원년인 684년 9월, 이경업(李敬業)이 맨 먼저 양주에서 무후에 반대하는 깃발을 올렸다.

비록 그의 거병은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무후에게 큰 경종을 울렸고, 마지막 승리를 눈앞에 둔 무후는 이 일로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후는 대단히 기민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경업의 반란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첫째 자신의 눈과 귀가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완전치 않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씨 종친을 뿌리 뽀지 않고는 제위에 오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상 저 유명한 밀고를 장려하고 혹리를 기용하는 ‘강압정책’이었다.

 

 무후는 이경업이 밀모를 통해 반란을 꾀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밀고(密告)를 제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누구든지 수도에서 황제를 만나 기밀을 밀고할 수 있게 되었고, 밀고 된 일은 누가 되었건 조사를 막을 수 없었다.

외지에서 수도로 올라와 밀고하려는 사람에게는 관에서 역마를 제공하고, 경유하는 지역에서는 5품관의 대우를 해주어야 했다.

수도에 도착한 다음에는 관가의 객사에 머무를 수 있고, 밀고가 사실로 확인되면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설사 밀고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추궁은 받지 않았다.

무후는 조정에다가 4)밀고만을 위한 상자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밀고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무후는 밀고자들 중에서 새로운 관리들을 선발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남을 해치는데 익숙한 오갈 데 없는 무뢰배와 교활하고 잔인한 이를테면 대혹리 주홍(周興) 같은 자들이 이 틈에 섞여 들어왔다.

이들은 잔혹한 수단으로 사건을 심리하여 무후가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정적들을 탄압하고 이씨 종친을 소멸시키는 일을 도왔다.

 

 밀고자와 혹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후는 빠른 속도로 종실 세력들을 소탕해갔다.

수공 4년인 688년, 월왕 이정(李貞), 낭야왕 이충(李沖) 부자가 ‘이당 왕실을 되찾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왕들과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여러 왕들이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무후는 이 사건을 빌미로 혹리 주홍을 책임자로 삼아 잔당을 색출하는 일에 착수했다.

주홍은 가혹한 형벌로 진술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씌우고 죄명을 날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씨 당 종실이 거의 절멸되었고, 동시에 그 일가친척 집안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해 9월, 무후는 30년 넘게 계속된 악전고투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자신의 재능으로 남성 중심의 봉건적 제약을 깨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5)그녀는 나라 이름은 ‘주(周)’로 바꾸었고, 자신은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자립했다.


 4) 무측천의 집권(690 ~ 705)

 무측천은 천수 원년인 690년 황제 자리에 오른 뒤부터 신룡 원년 705년 압력을 받아 자리에서 내려오기까지 모두 15년 동안 보좌에 앉아 집정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집정하는 동안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인심을 잃는 일들을 적지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이 기간 그녀의 파격적인 인재기용과 언론개방,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자세 등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균전제를 널리 실시하고 농업을 발전시킨 업적도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변방의 우환을 방어하며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보국안민의 사상을 실천했다.

 

 ① 인재등용: 무측천은 정권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바로 일련의 정책들을 잇달아 제정하고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종래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인재등용 제도를 수립했는데, 먼저 전시(殿試)라는 시험제도의 물길을 탔다.

재초 원년인 690년 2월 14일, 그녀는 수도에서 처음으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전시를 거행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인재들이 시험장을 가득 메웠고, 그녀는 일일이 직접 시험을 주관했다.

또한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무거(武擧)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시관(試官)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회 기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더 나아가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고,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상당히 완벽하면서 틀에 매이지 않는 무측천의 이러한 인재기용 제도는 그녀가 집권하는 동안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얼굴들이 쉴 새 없이 조정에 공급됨으로써 재상 적인걸(狄仁傑) 등과 같은 걸출한 문무 대신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②언로개방: 무측천은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백도 갖추고 있었다.

집정하는 동안 그녀는 언로를 널리 개방하여 6)각 방면의 전문가에게 의견을 폭넓게 듣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좋은 것을 활용했다.

간관 주경칙(朱敬則)이 그녀에게 글을 올려 가혹한 법보다는 은혜와 덕을 베풀어 천하 인민들이 걱정 없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고 충고했다.

표현이야 어찌되었든 심기를 건드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하지만 무측천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숱한 죄를 지은 혹리 주홍과 내준신 등을 잇달아 처형함으로써 조야의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또 주경칙을 재상으로 발탁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③7)농업생산: 생산발전에도 무측천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중에서 농업 발전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농업생산은 국민경제를 떠받치는 유일한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 토호나 사족들의 토지 겸병과 투기가 기승을 부렸고, 그 결과 농민들은 땅을 잃고 도망갔다.

따라서 생산발전은 엄중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는 불안했다.

이에 무측천은 즉각 토지매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여 호족들의 토지겸병을 막았다.

아울러 각종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도망간 농민들을 생산 현장으로 복귀시켰다.

예를 들어 새롭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조치를 비롯하여 세금을 줄여주는 등과 같은 구체적인 조치였다.

동시에 그녀는 각급 관원들에게 농업을 특별히 중시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농업에 방해되는 모든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아울러 경작지의 증감과 농사 상황 등을 가지고 지방관을 조사하고 상벌을 정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 덕분에 무측천 시기에 농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④국토방위: 무측천은 역사상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국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국경을 편하게 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등극한지 2년째 되던 해 서주도독이자 명장으로 이름난 당휴경을 시켜 토번에게 20년 넘게 침범당한 ‘안서의 네 개의 진’을 수복하여 서부 변경에 대한 근심을 해소하게 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물리치는 한편 정주(지금의 청해성 길살목이)에 도호부를 두어 안서도호부와 함께 천산 남북을 나누어 관활했다.

군사방면에서 무측천은 자영 농민으로 병사를 충당하는 이른바 부병제를 계승하는 한편 이를 더 발전시켰다.

그녀는 군사력의 비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장수를 비롯한 군사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에 따라 무측천 시기에 외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전한 걸출한 장수들이 적지 않게 출현할 수 있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적인걸, 정무정, 당휴경, 왕효걸, 곽원진, 배행검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무측천은 권력과 욕정 때문에 간사하고 약은 무리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창종, 장역지 형제는 권세를 위해 무측천의 노리개를 기꺼이 자청했으며, 총애를 믿고 당파를 지어 조정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상 그들은 무측천이 권력의 정상에서 추락하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라 볼 수 있었다.

 

 신룡 원년인 705년 정월 22일, 재상 장간지는 주도면밀한 안배를 거친 끝에 마침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낙양 황궁에 쇄도하여 먼저 장창종, 장역지 등 권신들을 죽인 다음, 무측천을 압박하여 황위를 태자로 책봉된 이현에게 양위하게 했다.

번득이는 칼날 아래서 무측천은 하는 수 없이 황제 자리를 아들 이현에게 물려주었다.

4일째 되던 날, 이현이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중종이다.

국호는 다시 당으로 바뀌었고, 그해 12월 16일, 무측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일대를 풍미했던 통 크고 남다른 모략을 지닌 풍운의 여걸은 죽음을 앞두고도 자기 생애의 모략 하나를 구사했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엄숙하게 자신의 황제 칭호를 떼어 내고, ‘측천대성황후’로 부르게 하라고 선포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봉건제도에서 사람들은 여황제인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무덤 앞에다 전례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우게 했다.

 

 

4. 맺음말

 8)신라와 연합,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앞에 비석 두개가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다른 하나, 무후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쓰여 있지 않다.

이 비가 무자비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도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의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사에서 측천무후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은 없다.

그녀는 현종의 할머니로 9)‘개원의 치(開元之治)’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며, 무엇보다도 중국사에서 전후 무후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였다.

줄곧 극단적인 남성 우월주의 사상으로 여자가 정권을 계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던 중국에서 여자가 황제로 등극하기라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날카로운 지혜와 후안무치의 행동, 남자들도 따를 수 없는 대담한 야심 등 완전히 자기의 실력에 의지하여 제위에 올랐으니, 당시 사회통념상 처지가 개벽할만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낙양의 당 유적을 복원하던 중, 성 밖의 함가창성 유적에서 수백 개의 땅 속 움막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곡물 저장 창고로 낙양은 대운하를 통해 들어온 강남의 미곡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비축곡량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의 집권기였다.

이것으로 중국 역대왕조의 숙원 사업이었던 고구려의 정벌도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덧붙여 당시 중국의 인구가 영휘 3년(652)의 3백80만 호로부터 무측천이 승하할 때까지 6백15만 호로 늘어났다는 것을 볼 때, 그녀의 통치기간이 중국 역사 전체를 보면 평화롭고 번영을 누리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녀는 생전의 여러 가지 잔혹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로부터 뛰어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황제의 지위에 걸맞은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인적인 평가: 권력에 맛을 들이면 차마 인간으로써 못할 짓도 서슴치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라고 갓 태어난 자기 딸을 죽이고 싶겠고,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고 싶었겠는가.

한낮 미물도 모정이라는 것이 있을진대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라는 설도 있다.

무조는 태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중이되는 인생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기적과 같이 건져졌다.

이후 무조는 무조건적으로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인생을 강요받았으며,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도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궁녀에서 소의로, 소의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황제로까지 올랐던 그녀의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

현대에 태어났으면 보다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펼쳤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여인.

 

 


[참고문헌]

당대 문화사 총설

중국 중세사

중국역대황제 - 추원초, 도서출판 박이정 2002

인물로 보는 중국사 - 강용규, 학민사 2000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가람 기획 1993

이야기 중국사 - 김희영, 청아출판사 1993

모략가 - 차이위치우, 들녁 2004

 


1) 이때 고종은 무후의 화를 피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상관의가 부추긴 것으로 떠넘겼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왕보승과 상관의는 처형당하고,
그 화가 집안에까지 미쳐 구족이 멸족되었다.


2) 『구당서』(舊唐書) 본기에는

“4월 기해(己亥)에 황태자 홍이 합벽궁(合璧宮)의 기운전(綺雲殿)에서 죽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新唐書) 본기에는 “기해에 천후(天后)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4) 조당(朝堂)에 동궤(銅櫃) 4개를 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적으로 밀고문서만 넣는

투서함이었다 한다.


5) 예종 이단을 황사(皇嗣)라 정하여 성을 무(成)로 고쳤다. 이것을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 부른다.


6) 광택원년(684)년에 상서좌복야 유인궤(劉仁軌)는 무후에게 여태후가 지은 패악을 열거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지 말 것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무후는

“인용하여 비유한 사례들은 모두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부끄러움과 위안이 교차합니다.

공의 충정은 시종 변함이 없고,
그 강직한 기풍은 고금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답신을 보내었다.


7) 초기 태종 이세민은 성인 남자에게 일정한 땅을 나누어주고 일정 기간 경작하게 하는 균전제를
 
통해 농업발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 균전제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8)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으며,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당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시기는 698년.


9) 당 현종이 다스렸던,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으로 당나라 국력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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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중국에서 여성으로서는 1)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 측천무후.(則天武后 624 ~ 705.12.16)

중국사에서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기껏해야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뒤에서 조정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당(唐)제국의 맥을 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무측천이었다.

 

 사실 무측천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650년대 말부터 약 30년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82년 생애의 절반 이상인 40년 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하다.

철저하게 남성위주 사회의 중국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2. 시대배경

 당의 고조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움에 있어서는 그의 둘째아들 이세민의 활약이 컸다.

당나라 건국 후 이세민의 인망을 질투한 태자 건성이 세민을 제거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세민은 기선을 제압하여 현무문에서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제거하였다.

 

 그 후 고조는 세민을 태자로 세우고 그로부터 2개월 후 제위를 세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서 은퇴하였다.

태종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안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당 왕조 300년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의 세제와 부병제의 실시, 과거 제도의 확립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여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2)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룩하였다.


3. 측천무후의 생애

 1) 출생 (624 ~ 637)

 무측천은 이름이 조(照)이고, 624년(唐 高祖 武德:당 고조 무덕 7년) 1월 23일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관적은 병주(幷州) 문수(文水:지금의 산서성 문수현)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수(隋) 양제(煬帝)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목재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다.

 

 617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무사확은 군수관(보급물자 담당 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에 그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했다.

이로써 그는 14명의 개국공신 행렬에 들어가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

 

620년 무사확은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 후 그들은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 번째 딸이 바로 무조(훗날의 무측천)이다.

무조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담이 컸다. 일찍이 무사확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무조는 13~14세 때 이미 많은 서적을 박람하여 견식을 넓히고 시사(詩詞)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2) 궁녀에서 황후로 (637 ~ 655)

 정관 11년인 637년, 태종은 무조가 열 네 살 되던 해에 그녀의 자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후궁에 데려다 재인(才人: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명하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무미를 미랑이라 불렀다.

 

 무조는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미모와 다양한 자태를 타고났다.

동시에 지혜롭고 문학과 역사에 밝았으며, 강인한 성품과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하는 여성이 바로 무조였다.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궁녀로 선발되었다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궁녀로 선발된 대부분의 여성들이 적막하고 깊은 궁에서 청춘을 헛되이 보네기 일쑤였다.

무조는 남들보다 뛰어나려면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궁에 들어온 그날부터 당 태종의 기호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태종에게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무슨 일로 기분이 아주 좋아진 태종이 문무백관들을 모두 불러 황실 마구간으로 가서 함께 준마를 감상했다.

태종은 말을 무척 좋아했으며, 죽은 뒤 그의 무덤 앞에는 그가 평소 아끼던 천하의 명마들을 돌에 조각하여 진열함으로써 태종의 뜻을 기릴 정도였다.

무조도 이 날 다른 몇몇 궁녀들과 동행했다.

태종이 몸집이 건장하고 털이 빛나는 사자총(獅子驄)이라는 명마 앞에서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이놈을 보아라, 얼마나 빠르고 씩씩한가. 하지만 성질이 너무 사나워 길들일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길들일 수 있는지 경들은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시원하게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들은 태종이 말을 얼마나 잘 길들이는 고수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흘렀고 이때 무조가 총총 걸음으로 태종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신첩이 이 말을 길들일 수는 있습니다만 세 가지 물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쇠로 만든 채찍이며, 둘째 역시 쇠로 만든 추이며, 마지막으로 비수입니다.”

 

 궁녀의 출현자체가 뜻밖이었는데 그 말도 하도 놀라워 모두들 두 눈을 크게 뜬 채 무조의 입만 쳐다보았다.

태종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무조를 살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우선 쇠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래도 길들여지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때립니다. 그러고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구멍을 끊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했지만 매서웠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미랑의 성질은 사나운 말보다 거칠구나. 대견한 일이로다.”

 

하며 가상히 여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무조는 궁중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물론이고, 당 태종은 그녀의 당돌함과 용기를 칭찬하면서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에게 한 차례 은총을 베풀었다.

하지만 후궁의 총애 다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비빈들은 젊은 무조가 손쉽게 청운의 꿈을 이루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무조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유언비어들이 떠돌았다.

 

 3)태백성(太白星:금성)이 멀건 대낮에 몇 차례나 나타나는 기상 이변이 있자 미신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고, 천문을 담당하는 태사공은 태종에게 ‘여자 군주가 일어날 징조’ 라고 해석했다.

이와 동시에 민간에서도 비기(秘記)류의 미신서와 예언서가 유행하면서, 당 왕조 3대 이후에 여자 군주 무왕(武王)이 출현할 것이라는 꽤 구체적인 내용의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총명했던 황제 태종도 시대의 한계 탓인지 미신을 꽤나 믿었고, 무씨 성을 가진 여자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낭(五娘)이라는 별명을 가진 개국공신으로 무련군공(武連郡公)에 봉해졌던 이군선(李君羨)을 죽이기까지 했다.

단지 무(武)자가 들어간 작위와 관련된 ‘오낭’이라는 별명  때문에.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언제든지 화를 당할 가능성이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총명한 무조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깊은 궁중에서 살면서 더 이상 경솔하게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특히 태종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언행은 절대 삼갔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임기응변하는 재주는 그녀를 난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태종은 그녀한테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으며 또 더 이상의 은총을 내리지도 않고, 깊은 궁궐에서 쓸쓸하게 12년을 지내도록 했지만 끝내 죽이지는 않았다.

 

 태종에 의해 버려지다시피 한 동안 무조는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차분히 형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출로를 찾기 위해 기회를 기다렸다.

태종의 병이 심각하여 머지않아 세상을 뜰 것이라는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서서히 뒤를 이을 태자 이치(李治:고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4)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부드러움으로 이치의 환심을 샀다.

 

 정관23년인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무조는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과 함께 감업사(感業寺)라는 절로 보내져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을 위해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조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돌아왔다.

 

 사실 무조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이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조의 입궁을 적극 부추겼던 것이다.

 

 다시 입궁한 무조는 정치적으로 더욱 성숙해져 있었다.

십 수 년에 걸친 직접 경험은 그녀에게 궁정 내부의 권력쟁탈이 얼마나 격렬한지 알게 했고, 또 투쟁의 방법과 본질을 배우도록 만들었다.

남은 평생을 비구니로 지내게 되리라 여겼다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무조는 고종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온갖 방법으로 고종을 유혹하여 이내 소의(昭儀)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렇게 9명의 빈(嬪)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이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여자라곤 황후와 네 명의 비가 전부였다.

 

 또한 왕황후에 대해서는 아주 존경하는 자세와 마음으로 겸손하게 충분한 예의를 갖추어 대했으며, 손톱만큼도 예에 어긋난 언행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런 무소의에 대해 왕황후는 마음을 놓고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무소의는 늘 왕황후와 함께 고종 앞에서 소숙비를 가차 없이 공격했고, 이렇게 해서 소숙비는 점점 고종의 눈에서 멀어져갔다.

이런 결과를 노렸던 황후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고종이 무소의를 총애하는 것이 소숙비를 총애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에 이르자 마침내 다시 황후의 질투심이 일어나 고종에게 무소의에 대한 험담을 하고, 그녀를 멀리하고 국사를 살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이런 황후의 의도와 달리 고종의 마음은 점점 황후에게서 멀어지고 무소의에게만 쏠렸다.

무소의는 황후가 평소 아랫사람이나 궁녀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구 부려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을 알고 아랫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관대하게 대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든 후 그들을 이용하여 황후를 비롯한 궁내의 모든 일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힘썼다.

그녀의 이런 작전은 적중하였고, 이것은 후일 그녀가 황후가 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때 비구니가 되었다가 이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니 그녀는 운명의 신이 자기를 돌보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궁중의 많은 여인들이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의 하나가 바로 황제의 혈육을 낳는 일이었다.

이에 무소의는 먼저 장자 대왕(代王) 이홍(李弘)을 낳고, 훗날 다시 공주를 낳았다.

 

 왕황후는 무소의가 임신을 하고 은밀히 민심을 매수하기 위해 이런저런 수단을 강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선수를 쳐서 상대를 제압하고자 했다.

무소의의 본심을 알아버린 왕황후는 시중 자리에 있던 외삼촌 유석과 조정 원로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등과 상의하여 그들이 고종에게 출신이 미천한 유씨 소생의 열 살 난 연왕을 태자로 봉하도록 일종의 압력을 넣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무소의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는 길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무소의가 제2의 소숙비가 되어 자신의 지위를 흔드는 일을 미리 막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왕황후의 이런 노림수로도 무소의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오히려 무소의와의 원한만 깊어졌고, 나아가서는 무소의의 전의를 더욱 굳게 다지는 자극제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무소의는 왕황후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아 더욱 더 독한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소의는 확실히 지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최고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이 낳은 딸을 희생시키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5)『자치통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황후가 총애를 다소 잃긴 했지만 고종은 그녀를 폐위할 마음이 없었다.

무소의가 딸을 낳자 황후가 찾아와 위로하고 갔다.

무소의는 여자아이를 질식시켜 죽이고는 이불로 덮어놓았다.

고종이 처소에 행차하자 무소의는 웃는 얼굴로 황제를 맞이했다.

그러다 아기가 죽은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 울부짖었다.

좌우 시중들에게 묻자 모두가 “황후께서 방금 전 다녀가셨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은 “황후가 내 딸을 죽여.”라며 크게 노했다.

이에 무측천은 울면서 황후의 죄상을 하나하나 고해 바쳤다.

황후는 변명할 길이 없었고, 고종은 이때부터 황후를 폐위할 마음을 먹었다.

 

 무소의의 독수는 아니나 다를까 효과를 보았다.

이 일로 고종은 왕후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여러 차례 폐위시키려했으나 장손무기 등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무소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심하여 만들어낸 모략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강력한 방해 세력을 눈앞에 두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외롭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그녀는 타고난 솜씨로 고종을 부추겨 은밀히 힘깨나 쓰는 신하들을 매수하도록 했다.

자신도 금은보화 등을 이용하여 장손무기가 자신을 지지하도록 설득했으나 뜻밖에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 일로 무소의는 설득 대상을 강직한 신하가 아닌 아첨꾼들로 돌렸다.

 

 한바탕 유세를 펼친 끝에 허경종, 이의부, 최의현, 원공수, 왕덕검 등과 같이 권세를 뒤쫓는 간신배들이 그녀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마침내 무소의를 옹호하는 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녀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깃발을 흔들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무소의는 측근들을 풀어 왕황후의 비리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했고, 그 결과 왕황후와 그 어미가 함께 고종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를 했다고 모함했다.

고종은 이를 사실로 믿고 왕황후를 폐위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아울러 왕황후를 지지하던 중서령 유석을 조정에서 내쫓았다.

 

 영휘 6년인 655년 9월, 무소의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고종을 부추겨 폐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조정 회의를 소집케 했고, 허경종, 이의부 등 권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황후 자리를 빼앗기 위한 그녀의 모략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무소의는 마침내 권력의 상징인 황후의 계관을 썼다.

 

 뒷이야기지만 왕황후와 소숙비는 무후의 명령에 의해 곤장 1백대씩을 맞고 수족이 잘린 후, 6)술 항아리에 집어넣어져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소숙비는 죽기 직전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증오에 찬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도깨비 같은 미랑 이년, 너는 진정 여우렸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네 여우의 농간 때문이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내세에는 고양이로 환생하여 쥐로 환생한 네 년의 목을 물어 끊고 말테다.”

 

 그 후 무후는 언제나 소숙비의 이 말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아 고양이를 몹시 두려워하여 궁중에서도 고양이 기르는 것을 금했다.

그뿐 아니라 소숙비 등의 망령이 붙어 다닐까 두려워 7)장안의 궁전에서 살지 않고 낙양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 한다.

 


1) 때로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했던 여후나 서태후 같은 여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 아들의 뒤에서 섭정이라는 형식을 취해 왕의 후광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2) 중국 당(唐)나라 제2대 왕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治世:626∼649)  


3) 태백성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관측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흉조로 간주하였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낮에 금성이 나타나는 현상은 황제를 상징하는 태양
이 약해져서

태백성과 밝음을 다투는 형세로 여겼다.


4) 태종이 아직 살아있을 때에 태자의 아이를 가지는 사태까지 있었다는 말도 있다.

- 인물로 보는 중국사(강용규)


5)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 광(司馬光:1019~1086)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6) 이때 무후는 “이 두음부를 뼈와 근육이 나른해지도록 취하게 해주어라.” 라고 말했다.


7) 장안이 건국 초부터 정치의 중심자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낙양은 동남으로 뻗은

경제의 중심지였었다.

하지만 무측천이 권좌에 오르자 동도(東都)였
던 낙양을 신도(神都) 라고 고쳐 불렀으며,

정치적 중심지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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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서 강사를 하던 지리학자 에르네스트 로페즈.
지루하고 딱딱한 강사 생활 보다는 바깥에서의 직접적인 활동을 꿈꾸고 있던 그는,
메르카토르의 의뢰와 원조를 받아 지도제작을 목적으로한 항해를 나서게 된다.

위는 파우라 라는 이름의 소녀와의 만남.
그녀는 고아가 된 자신의 진짜 고향을 찾아달라고 하면서 같이 배에 태워달라고 하는데...?




그나저나 에르네스트 항해음악 너무 좋다는...
듣다 보면 대양을 경쾌하게 가르는 배와 그 주변에 뛰노는 돌고래들이 오버랩 되리만치 낭만적인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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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기 싫은 자가 마저 죽기 위해 질러대는 넋두리 . . . . . . by 닌자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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