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권모로 정권을 쥐고, 황제자리에 앉다. (655 ~ 690)
무후는 황후 자리를 탈취하면서 자기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막강한 정적들을 보았다.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자신의 자리가 오래 갈 수 없음은 물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후가 된 그날부터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고삐를 바짝 죄였다.
그녀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 고종의 외삼촌이자 관롱 집단의 우두머리인 장손무기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조정의 대신 장손무기는 북주 이래의 명족이며, 국가의 주춧돌로서 30년이나 대신으로 일한 원로였다.
그러나 그와의 승부에서 패배하면 황후의 지위는 물론 일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휘하의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는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한번 권력투쟁을 하여 승리할 때마다 그만큼의 자기의 권좌가 강화되어 갔다.
이 무렵 무후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현경 5년인 660년, 고종은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다 두 눈의 시력을 거의 다 잃었다.
그러다보니 국사 전반을 기지 넘치고 영리한 무후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무후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징조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여자가 전면에 나서서 정치를 한 일이 없었기에 무후는 자신의 심복이자 조정의 보수파 중신들에 의해 승진이 막혔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두 사람과 국무를 처리했다.
또한 진사과 출신의 과거 합격자들을 요직에 등용시켜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기존의 공신집단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조치는 무후 개인에게 많은 이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상에 있어서 활발한 개혁의 작용을 하여 각 방면에서 많은 치적을 쌓게 하였다.
한편 무후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이름만의 황제인 고종은 그녀를 폐위하고 싶어 했다.
그때 한관 왕복승이 고종에게 달려와 무후가 도사와 함께 황상을 저주하는 굿을 벌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굿이라면 유별나게 꺼려했던 고종은 몹시 화가 나서 측근인 상관의(上官儀)를 궁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고, 이 과정에서 고종은 상관의로 하여금 무후를 내치는 조서를 받아쓰게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궁중에는 무후의 심복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폐위 조서가 작성되고 있다는 소식은 즉각 무후에게 전해졌다.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뽑힐 만한 다급한 소식을 들은 무후는 아름다운 눈썹이 곤두서고 노기로 새파래진 얼굴로 고종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려는 바르르 떨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종을 책망하면서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서가에 놓여진 칙서를 발견하곤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1)그리고 놀란 나머지 벌벌 떠는 고종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것이 고종으로서는 무후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었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은 나날이 무력해졌고, 무후의 세도는 갈수록 당당해져 황제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때 황태자는 유씨 소생의 이충(李忠)이었는데 무후는 이충을 폐하고 자신이 낳은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홍은 겨우 5세의 어린 나이었으나 성장함에 따라 어질고 효성스러웠다.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머니인 무후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직언하였기 때문에 무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상원 6년(674) 8월, 무후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제, 황후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 천후(天后)라 하였고, 이와 함께 12조항의 통치방침을 발표했다.
이것은 당나라에 대한 멸시일 뿐 아니라 남편 고종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으나, 이것으로 자기가 직접 집권하는 정권 수립에 한발 더 나아간 것이기도 했다.
다음해에 황태자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이미 30세를 넘었으니 빨리 결혼시켜 야 한다고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그런데 이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된 소숙비의 딸이었다.
고종은 기꺼이 황태자의 청원을 윤허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무후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음인지 황태자 이홍이 급사하는 변이 일어났다.
무후는 타고난 정치가였으므로 어머니이기 이전에 정치가였다.
2)무후가 황태자 이홍을 독살했을 가능성은 극히 농후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홍이 죽음으로써 옹왕(雍王) 이현(李賢)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고종의 여섯째아들로 무후가 이홍 다음에 낳은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현은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韓國夫人)이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한국부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었는데 궁중에 출입하다가 고종과 관계되어 이현을 낳았으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부인은 동생 무후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전해지고 있었다.
이현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로 그 주변에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들 학자들과 공동으로 남조 송대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은 3)『후한서(後漢書)』에 주석을 가하여 후세 연구가들에게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출생에 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후부터는 눈에 띌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여 점점 평판이 나빠져 갔다.
이런 가운데 무후로부터 황태자 자리를 양위하라는 압력을 받지나 않을까 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모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황태자의 마구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이 발견된 것이 증거가 되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얼마 후 파주로 옮겨졌다가 그 곳에서 자결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현(李顯)이 황태자가 되었다.
홍도 원년(弘道元年, 683) 고종이 죽자 황태자 이현(李顯)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중종(中宗)이고 무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중종이 즉위함으로써 황후가 된 중종의 처 위씨(韋氏)는 황후에 오르기 전부터 멀리서 시어머니 무후를 바라보면서 황후의 자리가 그렇게도 권한이 대단한 자리인가 하고 늘 선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망하던 자리에 오른 지금에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위황후는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문하시중의 요직에 기용하여 하였다.
이에 무후는 크게 노하였다. 이제 갓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친정의 영달을 생각하고 있는데 부아가 난 무후는 그러한 아내를 누르지 못한 황제 중종도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이현도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고종의 여덟 번째 아들 이단(李旦)이 예종(睿宗)으로서 즉위하였으나 그도 유폐 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을 뿐 정치에는 관여치 못하였다.
이제 무후 자신이 황제가 되려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이는 반대파의 완강한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씨 종친과 그 후손들의 목숨을 건 저항은 불을 보듯 뻔했다.
광택원년인 684년 9월, 이경업(李敬業)이 맨 먼저 양주에서 무후에 반대하는 깃발을 올렸다.
비록 그의 거병은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무후에게 큰 경종을 울렸고, 마지막 승리를 눈앞에 둔 무후는 이 일로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후는 대단히 기민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경업의 반란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첫째 자신의 눈과 귀가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완전치 않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씨 종친을 뿌리 뽀지 않고는 제위에 오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상 저 유명한 밀고를 장려하고 혹리를 기용하는 ‘강압정책’이었다.
무후는 이경업이 밀모를 통해 반란을 꾀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밀고(密告)를 제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누구든지 수도에서 황제를 만나 기밀을 밀고할 수 있게 되었고, 밀고 된 일은 누가 되었건 조사를 막을 수 없었다.
외지에서 수도로 올라와 밀고하려는 사람에게는 관에서 역마를 제공하고, 경유하는 지역에서는 5품관의 대우를 해주어야 했다.
수도에 도착한 다음에는 관가의 객사에 머무를 수 있고, 밀고가 사실로 확인되면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설사 밀고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추궁은 받지 않았다.
무후는 조정에다가 4)밀고만을 위한 상자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밀고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무후는 밀고자들 중에서 새로운 관리들을 선발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남을 해치는데 익숙한 오갈 데 없는 무뢰배와 교활하고 잔인한 이를테면 대혹리 주홍(周興) 같은 자들이 이 틈에 섞여 들어왔다.
이들은 잔혹한 수단으로 사건을 심리하여 무후가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정적들을 탄압하고 이씨 종친을 소멸시키는 일을 도왔다.
밀고자와 혹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후는 빠른 속도로 종실 세력들을 소탕해갔다.
수공 4년인 688년, 월왕 이정(李貞), 낭야왕 이충(李沖) 부자가 ‘이당 왕실을 되찾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왕들과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여러 왕들이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무후는 이 사건을 빌미로 혹리 주홍을 책임자로 삼아 잔당을 색출하는 일에 착수했다.
주홍은 가혹한 형벌로 진술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씌우고 죄명을 날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씨 당 종실이 거의 절멸되었고, 동시에 그 일가친척 집안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해 9월, 무후는 30년 넘게 계속된 악전고투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자신의 재능으로 남성 중심의 봉건적 제약을 깨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5)그녀는 나라 이름은 ‘주(周)’로 바꾸었고, 자신은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자립했다.
4) 무측천의 집권(690 ~ 705)
무측천은 천수 원년인 690년 황제 자리에 오른 뒤부터 신룡 원년 705년 압력을 받아 자리에서 내려오기까지 모두 15년 동안 보좌에 앉아 집정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집정하는 동안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인심을 잃는 일들을 적지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이 기간 그녀의 파격적인 인재기용과 언론개방,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자세 등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균전제를 널리 실시하고 농업을 발전시킨 업적도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변방의 우환을 방어하며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보국안민의 사상을 실천했다.
① 인재등용: 무측천은 정권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바로 일련의 정책들을 잇달아 제정하고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종래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인재등용 제도를 수립했는데, 먼저 전시(殿試)라는 시험제도의 물길을 탔다.
재초 원년인 690년 2월 14일, 그녀는 수도에서 처음으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전시를 거행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인재들이 시험장을 가득 메웠고, 그녀는 일일이 직접 시험을 주관했다.
또한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무거(武擧)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시관(試官)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회 기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더 나아가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고,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상당히 완벽하면서 틀에 매이지 않는 무측천의 이러한 인재기용 제도는 그녀가 집권하는 동안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얼굴들이 쉴 새 없이 조정에 공급됨으로써 재상 적인걸(狄仁傑) 등과 같은 걸출한 문무 대신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②언로개방: 무측천은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백도 갖추고 있었다.
집정하는 동안 그녀는 언로를 널리 개방하여 6)각 방면의 전문가에게 의견을 폭넓게 듣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좋은 것을 활용했다.
간관 주경칙(朱敬則)이 그녀에게 글을 올려 가혹한 법보다는 은혜와 덕을 베풀어 천하 인민들이 걱정 없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고 충고했다.
표현이야 어찌되었든 심기를 건드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하지만 무측천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숱한 죄를 지은 혹리 주홍과 내준신 등을 잇달아 처형함으로써 조야의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또 주경칙을 재상으로 발탁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③7)농업생산: 생산발전에도 무측천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중에서 농업 발전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농업생산은 국민경제를 떠받치는 유일한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 토호나 사족들의 토지 겸병과 투기가 기승을 부렸고, 그 결과 농민들은 땅을 잃고 도망갔다.
따라서 생산발전은 엄중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는 불안했다.
이에 무측천은 즉각 토지매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여 호족들의 토지겸병을 막았다.
아울러 각종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도망간 농민들을 생산 현장으로 복귀시켰다.
예를 들어 새롭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조치를 비롯하여 세금을 줄여주는 등과 같은 구체적인 조치였다.
동시에 그녀는 각급 관원들에게 농업을 특별히 중시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농업에 방해되는 모든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아울러 경작지의 증감과 농사 상황 등을 가지고 지방관을 조사하고 상벌을 정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 덕분에 무측천 시기에 농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④국토방위: 무측천은 역사상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국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국경을 편하게 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등극한지 2년째 되던 해 서주도독이자 명장으로 이름난 당휴경을 시켜 토번에게 20년 넘게 침범당한 ‘안서의 네 개의 진’을 수복하여 서부 변경에 대한 근심을 해소하게 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물리치는 한편 정주(지금의 청해성 길살목이)에 도호부를 두어 안서도호부와 함께 천산 남북을 나누어 관활했다.
군사방면에서 무측천은 자영 농민으로 병사를 충당하는 이른바 부병제를 계승하는 한편 이를 더 발전시켰다.
그녀는 군사력의 비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장수를 비롯한 군사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에 따라 무측천 시기에 외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전한 걸출한 장수들이 적지 않게 출현할 수 있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적인걸, 정무정, 당휴경, 왕효걸, 곽원진, 배행검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무측천은 권력과 욕정 때문에 간사하고 약은 무리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창종, 장역지 형제는 권세를 위해 무측천의 노리개를 기꺼이 자청했으며, 총애를 믿고 당파를 지어 조정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사실상 그들은 무측천이 권력의 정상에서 추락하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라 볼 수 있었다.
신룡 원년인 705년 정월 22일, 재상 장간지는 주도면밀한 안배를 거친 끝에 마침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낙양 황궁에 쇄도하여 먼저 장창종, 장역지 등 권신들을 죽인 다음, 무측천을 압박하여 황위를 태자로 책봉된 이현에게 양위하게 했다.
번득이는 칼날 아래서 무측천은 하는 수 없이 황제 자리를 아들 이현에게 물려주었다.
4일째 되던 날, 이현이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중종이다.
국호는 다시 당으로 바뀌었고, 그해 12월 16일, 무측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일대를 풍미했던 통 크고 남다른 모략을 지닌 풍운의 여걸은 죽음을 앞두고도 자기 생애의 모략 하나를 구사했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엄숙하게 자신의 황제 칭호를 떼어 내고, ‘측천대성황후’로 부르게 하라고 선포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봉건제도에서 사람들은 여황제인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무덤 앞에다 전례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우게 했다.
4. 맺음말
8)신라와 연합,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앞에 비석 두개가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다른 하나, 무후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쓰여 있지 않다.
이 비가 무자비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도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의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사에서 측천무후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은 없다.
그녀는 현종의 할머니로 9)‘개원의 치(開元之治)’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며, 무엇보다도 중국사에서 전후 무후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였다.
줄곧 극단적인 남성 우월주의 사상으로 여자가 정권을 계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던 중국에서 여자가 황제로 등극하기라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날카로운 지혜와 후안무치의 행동, 남자들도 따를 수 없는 대담한 야심 등 완전히 자기의 실력에 의지하여 제위에 올랐으니, 당시 사회통념상 처지가 개벽할만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낙양의 당 유적을 복원하던 중, 성 밖의 함가창성 유적에서 수백 개의 땅 속 움막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곡물 저장 창고로 낙양은 대운하를 통해 들어온 강남의 미곡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비축곡량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의 집권기였다.
이것으로 중국 역대왕조의 숙원 사업이었던 고구려의 정벌도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덧붙여 당시 중국의 인구가 영휘 3년(652)의 3백80만 호로부터 무측천이 승하할 때까지 6백15만 호로 늘어났다는 것을 볼 때, 그녀의 통치기간이 중국 역사 전체를 보면 평화롭고 번영을 누리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녀는 생전의 여러 가지 잔혹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로부터 뛰어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황제의 지위에 걸맞은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인적인 평가: 권력에 맛을 들이면 차마 인간으로써 못할 짓도 서슴치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라고 갓 태어난 자기 딸을 죽이고 싶겠고,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고 싶었겠는가.
한낮 미물도 모정이라는 것이 있을진대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라는 설도 있다.
무조는 태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중이되는 인생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기적과 같이 건져졌다.
이후 무조는 무조건적으로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인생을 강요받았으며,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도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궁녀에서 소의로, 소의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황제로까지 올랐던 그녀의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
현대에 태어났으면 보다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펼쳤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여인.
[참고문헌]
당대 문화사 총설
중국 중세사
중국역대황제 - 추원초, 도서출판 박이정 2002
인물로 보는 중국사 - 강용규, 학민사 2000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가람 기획 1993
이야기 중국사 - 김희영, 청아출판사 1993
모략가 - 차이위치우, 들녁 2004
1) 이때 고종은 무후의 화를 피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상관의가 부추긴 것으로 떠넘겼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왕보승과 상관의는 처형당하고, 그 화가 집안에까지 미쳐 구족이 멸족되었다.
2) 『구당서』(舊唐書) 본기에는
“4월 기해(己亥)에 황태자 홍이 합벽궁(合璧宮)의 기운전(綺雲殿)에서 죽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新唐書) 본기에는 “기해에 천후(天后)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4) 조당(朝堂)에 동궤(銅櫃) 4개를 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적으로 밀고문서만 넣는
투서함이었다 한다.
5) 예종 이단을 황사(皇嗣)라 정하여 성을 무(成)로 고쳤다. 이것을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 부른다.
6) 광택원년(684)년에 상서좌복야 유인궤(劉仁軌)는 무후에게 여태후가 지은 패악을 열거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지 말 것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무후는
“인용하여 비유한 사례들은 모두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부끄러움과 위안이 교차합니다.
공의 충정은 시종 변함이 없고, 그 강직한 기풍은 고금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답신을 보내었다.
7) 초기 태종 이세민은 성인 남자에게 일정한 땅을 나누어주고 일정 기간 경작하게 하는 균전제를
통해 농업발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 균전제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8)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으며,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당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시기는 698년.
9) 당 현종이 다스렸던,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으로 당나라 국력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였다.